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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교회 5월 22일 설교말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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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 로마서 1장 16절 17절 )

최근 들어 코로나 방역정책이 대부분 해제되었습니다.
실내에서 마스크만 착용하면 사실 어디든 못 갈데가 없어졌는데요.
다들 어떠신가요? 좋으세요? 나쁘세요?

의견들이 분분하겠지만 저는 잘된 조치라고 봅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예배가 회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소식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안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최근(2022. 5. 21) 기독일보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교회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 교회에 나오던 교인 10명 중 2명 정도는 
현재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결 교회 총회에서는 리얼미터라는 조사기관에 의뢰하여, 
지난 5월 3일부터 10일까지 총회 소속 담임목사 500명을 대상으로 
‘코로나 전후 목회의 변화’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인데요.
총회에서 19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를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코로나19 발생 이전 교회 출석 교인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후 출석 교인의 수에 대해 응답자들은 평균 78.63%의 출석율을 보이고 있다고 답했고,
교회 헌금도 15% 정도 줄었다고 답했습니다.

교인들이 왜 줄었을까요?
우려스러운 것은 교회에 출석만 하던 사람들,
마당만 밟고 가던 '교인'들이 더 이상 출석의 계기가 없어지게 되면서
믿음을 얻을 기회가 사라지는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인'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종교행사를 거룩하게 잘 치루고 헌금도 잘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교인'입니다.

하지만 헌금액수도 적고 교회를 간신히 출석하고 봉사를 전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공표했었으나,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그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 대며 예수님을 부인하기를 강요하는 순간이 온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한 고난을 이겨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북한이나 공산주의 국가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 민국은 예수님을 믿기에 큰 고난이 따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고난들이 있지요.
여러가지 고난 중 하나는 부끄러움입니다.

여러분은 식사 기도를 하시나요?
혹자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으나 제 소견은 다릅니다.
식사 기도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공표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식사 기도를 드리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것'과 '내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것'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둘 째는 '교회다니는구나? 근데 사람이 저 모양이야?' 라는 비난으로 교회를 욕먹이는 것에 
걱정이 되서 그럴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완전한 사람, 인자가 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자 그 가르침을 따르고자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기독교 가치관으로 하나님에게도 칭찬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송을 받는 단계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사실상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죄악 가운데 넘어지고 쓰러질 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의지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헬라인"이란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들을 일컫습니다.

복음의 구원의 조건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좌우됩니다.
행위도 물론 중요하지만 믿음의 단계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행위가 바뀌는 것이지
행위가 먼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행위를 바뀌게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행위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래된 믿음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행위의 열매가 전혀 맺히지 않는다면 믿음을 점검할 필요는 있습니다.

자신이 죄악에 물든 사람은 누군가가 그를 전도할 때 '나는 교회 다니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시지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누가복음 5:32 )

회개란 눈물이 아니라 돌이킴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인정하고 모셔들었으나 다시 살아나는 자신의 옛 자아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라도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망할 시간에 그보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믿고 끝까지 의지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넘어질지라도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누가복음 9:26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마태복음 10:32 )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 또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또한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0:42 )

이 말씀의 핵심은 구제를 베푸는 것보다 "제자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의 이름이란 예수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열 두 사도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만일 내가 칭송을 받으려고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베푼다면 천국에서는 아무런 상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어 예수님께서 이 것들을 베푸는 것입니다 라고 할 때,
그 일에 대해 말씀에서 분명히 천국에서의 상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것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공표'이자 제자됨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가복음 12:8절의 말씀을 읽으면 가슴벅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설 일이 언제일까요? 바로 세상 끝날이 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로요? '내 아들, 딸이자 친구'로 말이지요.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사람들 앞에서 그 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자랑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끄러워 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누가복음 9:26 )

나는 부족하고 부끄러울지라도 예수님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다닌다'라는 말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간의 믿음을 도울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를 소망하는 모든 분들께, 다음과 같이 고백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나는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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